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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저널 총괄 사장에 금융인 출신 조승현씨 선임명동 틈새 금융의 ‘마이더스 손’이 ‘언론계의 신화’를 만든다.
조승현 기자

 

종합 미디어 그룹 일요저널(대표이사 오경섭)은 2015년 8월 17일 임시 주주 총회와 이사회를 열고 금융권 출신 조승현씨(61세)를 신임 총괄사장으로 선임했다. 조승현 총괄사장은 구 상업 은행(현 우리은행) 출신으로 국내 최초의 엔터테인먼트와 신기술제품 투자 회사인 고려 창투사(자본금100억원)를 설립하는 등 기업 구조 조정 전문가로 활동해 왔다. 진보적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조 사장은 선임 인사말을 통해 일요저널이 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쥬’ 정신을 실천하고, 우리나라의 개국 이념인 ‘홍익정신’ 실현에 앞장설 뜻을 밝혔다. 종합 미디어 그룹인 일요저널은 지난 1987년 창간한 <일요저널>과 1995년 창간한 <영남 스포츠>, 그리고 2004년 설립된 <한국 문화 스포츠 혁신회>의 정신을 이어 받아, 그 동안 국내 시사매거진 분야의 리더임을 자부하면서 대종상과 K-STAR상시상식을 주관 및 후원하고 계열사인 자인언트 미디어와 한국엠엔에이 미디어 그룹을 통해 방송사 외주 프로그램 제작과 매거진 제작, 홈 쇼핑 제작, 아나테이너 교육과 기획 업무 등 융합 미디어의 선두 주자로 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일요저널은 방송, 신문, 잡지의 융합이란 새로운 실험에 대한 재정적 부담과 국제 환경의 급속한 변화, 컨텐츠 분야의 가속도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 선택의 일환으로 발행과 경영을 분리하여, 금융인 출신으로 기업 구조조정 전문가인 조승현 씨를 사장으로 선임하여, 언론 컨텐츠와 전문 경영으로 집중과 개혁을 시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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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증권과 지하 금융, 창투사 의 노하우를 언론사 경영에 보탤 것

 조승현 일요저널 신임 총괄사장은 금융권에서 ‘숨은 진주, 마이더스의 손’이라 불리 운다.

정통제도권 출신이면서도 금융의 보수주의를 과감하게 탈피해 지하 금융, 즉 사금융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최근까지 한국투자정보센터을 운영하면서 국내 유일의 중소기업의 진단과 구조 개선 작업(워크아웃)을 진행하여 성공률 100%의 신화를 일구기도 했다.

  태권도 선수 출신으로 14년간 금융기관(상업은행) 정식 사원 근무한 특이한 경력 보유

 조승현 사장은 월출산 국립공원과 영산강 하류의 기름진 옥토, 나주평야가 있는 전라남도 영암군 출신으로, 어린 시절 경찰공무원인 부친과 육군사관학교 출신 외삼촌의 영향으로 투철한 국가관을 확립했다.

조 사장은 이에 대해 “저는 호남지역에서 대대로 기득권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대한민국 체제 수호에는 그 누구보다 투철한 사명관을 가지고 있다”며 “이 점에서 영남권 출신으로 부친 삼형제가 모두 국가유공자인 오경섭 대표이사와 조사장 역시 부친과 외가 모두가 국가유공자인데 국가유공자라는 자랑스러움으로 동-서 화합의 절묘한 궁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청소년기에 유명한 태권도장 송무관의 류호평 관장과 전 전남 체육중고등학교 와 국가대표 총감독인 양승길 교수의 수제자로 체력을 연마하여, 과거 학도체육대회에 태권도 선수로 참가하는 등 유명한 운동선수 출신이면서도 금융기관에 정식 직원으로 근무한 특이한 경력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해남서국민학교 와 영암 중학교, 광주 송원고를 졸업하고, 경기대와 동국대학교 대학원. 중국 상하이 공정기술대에서 수학하였다.

증권거래소가 서울 명동에 있을 때 2년 동안 증권업종인 동화증권 주식회사 투자상담실과 한국 상업은행 (현 우리은행)에서 12년을 근무하면서, 대기업여신과 신용분석을 담당하였고, 노동조합간부와 마케팅전문가, 투자상담가, 신용평가사, 경매컨설턴트 등으로도 활동했다.

 

제도권 금융의 보수성에 실망, 사금융 발전위해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사직

조승현 사장은 이 외에도 부동산중개와 채권추심 위임사 등 다양한 자격과 경력을 바탕으로 제도권내의 여신전문가의 길을 걸어오던 중, 해외 선진 금융을 공부하게 됐다.

그는 해외 금융을 통해 국내금융정책의 보수성과 금융인들의 구태 의연한 업무 자세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노동조합 활동을 통하여 금융의 진보성이란 뜻을 펼치려 하였으나, 금융권 노조의 보수성과 경영진들과의 일부 나눠 먹기식 운동 방향에 실망하여, ‘금융의 창조성과 미래성, 국제성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이며, 초석’이라는 판단아래 당시 지하금융으로 불리던 사금융을 발전시키기 위해 제도권 제1금융기관인 한국 상업은행을 자진 사직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이 같은 조승현 사장의 기인 행각 혹은 특출한 아이덴티티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잠실 주공 아파트 포기하고 포니 승용차 선택, 은행원 하이칼러 패션 최초 파괴

조승현 사장은 우리나라 증권 산업의 초창기 시절 특출한 영업력과 업무 추진력으로 20대 중반에 이미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되자, 부동산에 눈을 뜨게 된다.

그러나, 그는 당시 260만원에 분양하는 잠실주공1차 아파트를 구입할 것이냐, 현대 자동차가 국내 최초로 생산한 비슷한 가격의 포니 승용차를 살 것이냐를 1시간 가량 고민하다가 결국 포니 승용차를 구입했다고 한다.

이 때의 선택과 관련 그는 지금도 “물론 재테크 전문가로써 당연히 아파트를 사야 했었지만,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 20대 젊은 나이로 승용차를 몰고 명동과 종로, 전국을 누비던 추억은 수십억원으로 맞 바꿀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라며 다시 한 번 선택의 순간이 와도 그는 포니를 선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기이함을 결혼관에서도 불 수 있는데, 그는 한때 20세기 프랑스 최고의 지성 ‘장. 폴. 샤르트르’와 여성 해방론자 ‘시몬 드 보브와르’의 계약 결혼에 매료되는 등 그의 인생관은 철저하게 ‘삶 중심의 이론 이전의 실물주의’로 볼 수 있다.

그는 또 상업은행 근무 당시, 당시 은행원의 상징이던 소위 하이 칼러 패션, 즉 검정색과 회색, 청색 양복에 흰색 하이셔츠, 청색계통 넥타이란 공식을 과감하게 깨드렸다.

그는 제 1금융기관 최초로 당시는 혁신적인 청색 와이셔츠에 핑크색 넥타이를 착용했고, 당시 유행하던 장발머리를 하여 상급 기관으로부터 지적을 받아 진급이 늦어지기도 했지만, 이에 아랑곳 하지 않는 ‘마이 웨이 인생-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사채쟁이 인식 탈피, 틈새 금융 상품 개발’로 명동 사금융 시장 진출

그의 이 같은 혁신주의 내지는 보수성 파괴 성향은 당시 금융권의 낙후성에 대한 염증으로 이어졌다. 당시 금융권에서 은행원을 평가하는 방법은 전기요금이나 재산세 유치 등 같은 은행끼리 같은 과목(?)을 경쟁하는 지극히 1차원적인 것들이고, 진짜 중요한 사업성과 국제성을 외면했다.

또 은행원들의 폐쇄적 사고, 즉 소비는 생산을 유발하고, 은행 돈을 떼먹는 자들이 은행을 가르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운영 방식은 선진 금융 기법의 발전을 막고 있었다. 그래서 조승현 사장은 상업은행을 퇴직하자마자, 국신파이넨스를 설립하고 명동 사금융(틈새금융) 시장에 진출한다.

당시는 사금융뿐 만 아니라 은행대출 이자도 24%~36%를 받던 시대였다. 조 사장은 먼저 ‘명동 사금융 =사채 쟁이’란 인식부터 바꾸려 했다.

그는 일반 대출과 적금 대출, 할인 어음, 외화 대출, 지급보증에 한정된 제도권 관치금융사의 업무 영역이 아닌 실질적 담보와 영업권, 초상권, 특허권이나 시스템을 상품으로 하는 틈새 금융 상품이 우리나라 금융 산업을 이끈다는 생각에 이 분야 상품 개발에 주력했다.

수영전자
최초프랜차이즈 해피엔딩

 첫 작품은 명동 유네스코 회관 국신 파이낸스, 투자자 구름처럼 몰려

 당시 사금융의 산실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시작한 ‘국신 파이낸스’는 이러한 그의 금융철학이 만든 첫 작품 이었다. 그는 이후 설립된 상업금융캐피탈과 함께 당시 금융기관들은 꿈도 꿀 수 없던 금융상품을 최초로 개발했다.

그는 고리 이자만을 받는 사채가 아닌, 제도권이 못하고, 알면서도 규제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에 눈을 떴고, 풍부한 경험과 사업력과 기술력을 갖추고서도 과감하고 진취적 밴처기업이나 엔터테이먼트업종의 경영자들이 금융환경에따라 발생할수있는  불량 거래자라는 낙인만으로 금융혜택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기업인과 기업, 개인들에게 시드 머니 위주의 금융 지원을 해 주는 틈새 금융업의 기본 원칙을 만들었다.

 이러한 기본 원칙과 자부심을 바탕으로 시작된 ‘초기 유네스코 회관 틈새금융의 시작’은 금융인이면서도 카드결재나 가계 수표 결재를 하지 못하는 금융인과 고급공무원, 라이센스 보유자를 상대로 단기 금융을 시작해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사무실에 구름처럼 몰려 등 투자자들 중에는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퇴직을 앞둔 교장 선생님도 있었다.

그는 “이때 대출을 위한 투자금 조달은 수혜를 받은 대출자들 중 여유 돈이 생기면, 일정금리와 필요시 대출해 주는 한도를 적용하기에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아 투자하는 투자자들의 자금으로도 충분하여 오히려 받은 투자금을 돌려주려는 부서를 따로 둘 정도였다.”며 “틈새 금융 상품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담보만 설정해주는 방식으로 수익까지 들어오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는 셈”이었다며 당시를 회고 했다.

 유가증권 담보대출과 동산 담보대출로 부도 직전 기업 살려내며 ‘신의 손’ 별명 얻어

 이처럼 그가 만든 상품에 너도 나도 투자하려다 보니, 새로운 상품 개발이 절실했고, 그는 밤잠을 안 자며 당시에는 혁신적인 수 많은 금융 상품을 만들어 냈다. 일요저널 조승현 신임 사장의 진가는 유가증권 담보대출과 동산 담보대출 취급에서 나타났다.

그는 “동산담보대출의 첫 담보는 년말에 직원 급여도 줄 수 없어 부도직전이던 선풍기 제조를 하여 대기업에 납품하는 업체로, 공장 창고속의 선풍기를 담보로 대출해 주어 부도를 면하게 했고, 그 후 이 업체는 급성장했다”며 “이후 부탄가스와 감지 센서등, 비디오폰, 리모컨자물쇠, 금강 티켓, 백화점 상품권, 회원권 등 기업의 환가성과 유동성을 제공하여 금융의 포인트인 시기와 유통(환가)을 보장하는 업체로 성장하였다.”고 설명했다.

그의 새로운 금융 상품이 부도 위기의 수 많은 기업들을 살려 내면서 그에게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신의 손, 조승현’이 만든 금융 상품은 명동 지하금융이란 당시에는 금융에 비전문가인 전주(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금융기관 출신이 아닌 주로 권력기관이나 법무사, 변호사 사무장. 부동산중개업종 중심의 사람들)위주의 주금 납입과 카드깡, 환치기(일명 역송금) 등 음성적 소득에서 차츰 금융상품개발 위주의 사금융이 시작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상품은 현재 고리업종으로 변질된 자동차 담보대(일명 차차차 대출)나 금융기관에서 취급하는 건설자금대출(일명 프로젝트 파이낸싱)의 시효, 혹은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장외주식 거래시장 활성화, FLOW자금 대출은 최고의 찬사 받아

 특히 조승현총괄사장은 상업금융캐피탈을 설립하고 증권회사 투자 상담실 시절부터 기획한 장외주식(비상장 주식)거래시장은 비상장주식보유자들에게 유동성과 환가성을 제공하였다. 장외 주식시장의 태동(1990년대 초)으로 그 동안 감춰두거나 음성적 거래를 하던 엄청난 자금들이 양성화되면서, 금융의 투명성 제공과 비상장기업의 자금지원이란 효과를 내면서 엄청난 창업과 고용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FLOW자금 대출은 조승현사장이 개발한 금융상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는 대기업 계열사 간이나 작은 규모의 금융기관(당시 신용금고, 마을금고, 협동조합, 단위 농,수,축협)간에 일시적인 유동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한쪽에서 남아도는 자금으로 부족한 한 쪽을 메꾸는 금융 작업을 했다.

유동성이 부족한 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을 상대로 채권이나 미수채권, 대여금, 이익이 되는 사업성, 생산된 완제품, 특허권 아니면 융통을 목적으로 하는 어음(CP)등을 담보로 자금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 같은 대출은 당시 IMF로 인한 자금부족을 해결함으로써 기업의 미래성을 보장하는 금융업으로 자부심을 가지게 했다.

100% 개인 출자 자본금 100억 ‘고려 창투사’ 설립

그의 탁월한 현실 감각은 고려 창투사 설립에서도 볼 수 있다. 고려창투사는 조 사장이 100% 개인이 출자한 자본금 100억원의 창업투자사로, 국내 최초로 엔터테인먼트와 신기술에 투자했다. 이 가운데 강남의 대형 레스토랑과 장안동 카바레, 수원역 앞 대형 카바레에 대한 투자는 국민의 즐길 권리, 즉 밤 문화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그의 철학과도 일치했다.

그는 “국민이 필요한 권리를 충족시키는 실물을 위한 금융지원이 필요하고, 이는 다수의 의견으로 만든 선한 것만이 꼭 정의일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며 “공부 만이 최고이고, 기술이나, 연예인, 상공인을 도외시하던 그때 사회분위기는 지금의 사회와는 너무 동떨어진 사고였기에 나는 더욱 더 성공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대우 그룹 거래가 결국 발목 잡아, 5년여 해외 생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결국 같은 것’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그런 그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그는 당시 하이컬러들의 우상이며 대한민국의 내일을 심은 수출드라이브정책으로 세계 속에 뛰어 들어가 성장하던 대우그룹과 거래를 했는데, 이것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대우의 몰락 시기에 대해 “사업 확장 일로에서 대우그룹의 몰락과 함께 도산을 겪어야 했지만, 항상 지금보다 처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던 시절이 더 힘들었다는 긍정적 사고가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준 모태이기도 하다.”고 회고 했다.

그는 대우 그룹의 부도와 함께 자의 반, 타의 반, 5여 년 동안 해외 생활을 하게 됐다. 태국 등 동남아시아와 호주 등 오세아니아, 중국, 몽고, 러시아 등을 떠 돌면서 사람의 삶과 금융의 역할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 스스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며 돈은 쓰려고 버는것이지 모으려고 버는것이아니라는 결론을 낸 것이다.

귀국 이후 그의 삶은 이 전과는 다르게 진행됐다. 금융업자에서 금융철학자로 변모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조승현 총괄사장은 일요저널 오경섭 대표이사와의 인연으로 인해 난생 처음 언론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됐다고 한다. 다음은 조승현 신임 총괄사장과의 일문 일답. 

질문 1. 경찰과 육사 집안의 장남으로 금융 업무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해남 서국민학교입학기념

 - 제 몸 속에서는 본래 은행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집안은 조상 대대로 호남 지역의 양반, 지주 계급이었는데, 농경사회 시절에 ‘셋거리’라는 나락1섬(도정 전의 벼 2가마)을 봄철에 빌려주고 추수기에 1섬반(3가마)을 받는 원시 금융업을 한 집안이었습니다. 이후 호남(특히 영암)중심의 지주들이 설립한 호남은행 설립자 중 한 사람이 저의 외조부이셨습니다. 저는 3남 3녀중 장남이었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남동생들은 각각 수협과 농협에서, 여동생은 국내 유수의 증권 회사에서 근무하는 등 모두 금융권에 종사했거나 종사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에 선생님들께서 장래 희망을 물으면, 친구들은 주로 대통령과 장관, 장군 등 권력 지향적인 직업을 택했지만, 저는 항상 ‘가장 돈 많은 사람’이라고 적어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금융권에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공부하면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았다고 봐야지요.

질문 2. 금융상품 계발(啓發)은 어떻게 하게 됐는가?

호주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 외국 여행이나 공부 중에 선진국(특히 일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보고 카피하거나 응용한 것인지, 제 스스로 새로운 금융 상품이란 ‘원천 기술’을 개발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당시의 환경이나, 사회적인 분위기, 저의 현실에 맞춘 것 뿐입니다. 이 가운데 제가 직접 연구한 것도 하나 있는데, 바로 ‘자금창출부분’입니다. 대기업(당시 30대기업) 의 어음을 할인할 때, 당시 어음할인 후에 그 할인한 어음을 시중은행 보관어음계정에 보관하고, 그것을 담보로 대출받아 다시 할인하고, 또 같은 방식으로 계속 반복하다보니깐, 10억 원의 기초 자금이 나중에는 60억 원의 보관 어음을 할인하는 시스템이 되더군요. 당시 사람들은 저를 보고 천재라고 극찬을 하더군요. 몇 십년이 지나 미국에서 ‘서브 프라임 사태’가 나서보니, 채권을 담보로 증권화하여 다시 파는 것으로 저의 수십년 전 기법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결국 금융도 ‘독점’이나 ‘영원함’은 없다는 것이지요.

 질문 3. 학력을 보면 고등학교에서 대학원까지 거의 졸업이 없고 중퇴인 이유는?

고교시절

 - 스스로 나온 적은 없습니다. 출석 일수나 등록금 미납, 기행 등으로 쫓겨 난 것인데, 성적으로 밀려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 성적 말고도 다른 것에서의 경쟁과 조건이었고, 그 경쟁에서 밀렸다는 뜻이지요. 저는 그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질문 4. ‘경제 민주화’나 ‘평등한 분배’ 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열심히 하는 사람과 게으른 사람, 공부 하는 자 와 하지 않는 자, 가진 자와 없는 자, 물려받은 자 와 물려 받지 못한 자. 합격자와 불합격자, 운이 좋은 사람과 운이 나뿐 사람, 줄서기를 잘한 자와 못하는 자, 하다못해 복권 당첨자와 당첨되지 않은 사람이 모두 똑같이 평등하고, 공평하게 분배된다면 누가 복권을 사고 공부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까? 이런 건 질문이 아닙니다. 다만 노약자나 장애인들은 다르지요. 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으니깐요. 평등은 조건을 말하는 것이지, 존재를 인정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나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 그리고 국가의 역할, 플라톤이 말한 철인 정치 등을 되짚어 봐야 합니다. 왜 가난하게 되었는지를 스스로가 알면서 ‘자기 합리화’하여 선택한 경우와 다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선택한 바보가 어디 있냐고 하지만 선택은 선택입니다. 분배는 물질을 나누어주는 적선이 아닙니다. 교육 기회의 균등이 최고의 분배라 할 수 있지요.

 질문 5. 현재 소상공인들이 건국 이후 가장 힘들다고 하는데, 어떤 부분이 힘들다고 보는지요?

 - 그런 건 실제 현장에서 하는 자영업자나 기업인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바로 정답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그들은 다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겉으로는 작아 보이는 간접세금 (부가세, 교육세, 방위세, 특별소비세 등), 효과와 능률에 비해 너무 높은 인건비, 소득에 비해 과중한 임대료를 말하는데, 공무원이나 경영자들은 이것을 그냥 세금, 인건비, 임대료라고 단순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이 말의 어감이 천지차이입니다. 1달 보수가 1억원인 직원이 회사에 1억원 이상을 벌어주면 비싼 인건비가 아니지요. 마진이 많은 상품에 10% 부가세가 많다고 할 수 없듯이요.

 또 개인 택시와 법인 택시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비슷합니다. 다 같은 택시 운전자이면서도 똑같이 긴급한 돈이 필요해서 죽자 사자 일하면 개인택시는 경험도 많고 사납금도 없으니, 수익성이 높겠지만, 법인 택시는 그렇지 못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장기화되면 법인 택사 운전자들은 몸만 상하는 결과가 오는 차이입니다. 몸 상태에 맞춰 일을 효율적으로 열심히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 하면, 건국 이후 없는 자는 항상 최악이고, 가진 자는 항상 호황입니다. 그 이유의 느낌은 가진 자 와 없는 자가 한울타리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 빈곤감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해방이후부터 60년대까지를 회고하고 우리나라나 다른 후진국들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한편으로는 부가 넘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질문 6. 대학원에서 금융 철학 과목을 만들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하는데?

 - 돈은 쓸려고 버는 것이지, 모으려고 버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 이상의 돈을 가진 사람들은 투자를 해야지요. 학연과 지연, 혈연에 대한 투자가 아닌 미래와 발전을 위한 부분에 투자해야합니다. 나눔을 기대하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게으른 사람이나 하지 않으려는 자를 더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내 것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나 자식 마저도 내 것이라는 소유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굳이 내 것이 있다면 자식을 키우고 사랑하고 가르치는 것이죠. 오직 한 순간, 한 순간, 살아가는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일 뿐이므로 굳이 없더라도 소중함과 필요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과유불급만 생각하면 됩니다. 이 부분은 너무 많은 설명이 필요한 내용이기에 다음에 시간나면 하지요.

 질문 7. 대우그룹의 몰락과 함께 금융인의 길을 접으시고, 이제는 기업 합리화 등 컨설팅이나 후학을 지도하는 일 만을 하시고 계시는데, 대우그룹의 부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 회사의 부도란 돈이 없어 일어난 경제적 사망(중단)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대기업의 부도는 이유가 다릅니다. IMF 당시 ‘어렵다’는 대기업들은 비슷한 조건과 업종들이기에 국가의 결정으로 관치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지원하면 부도가 나지 않지요.

대기업의 부도 이유를 대충 살펴보면, 국가정책의 변경이나 유동성 확보 부족, 세계 경제 환경의 변화, 대형사고나 전쟁, 지도자의 생각 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우그룹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스켓 금융 논리’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당시는 IMF사태의 여파로 모든 대기업들이 힘든 상황이었고, 국가는 북한 진출정책을 하려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는 영남 중심의 보수주의자에서 충청도와 전라도 중심의 진보주의자들로 이동이 있었고, 국민들은 삶의 빈곤을 벗어 나, 휴머니즘과 문화, 예술 등 다양성을 요구하는 사회 환경의 변환기였습니다. 때문에, 분명 대기업 중 한 곳은 비워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을 예견했지만, 당시 전경련회장이고, 자산규모 1위이며, 수출 드라이브 정책의 선두 주자이며, 김대중 대통령과는 경제마인드가 가장 가까웠고, 소문으로는 일정 부분 선거자금도 대여했고, 특히 이헌재 금융위원장은 대우통신 사장 출신이었기에, 대우그룹이 타겟이 된다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지요.

즉 배신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워크아웃대상이 대우그룹이 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아직 이유와 평가가 없는 것은 당시 정책 수행자들이 워크아웃 과정(대우 그룹 분해)에서 보수파들과 분배하다보니, 이제껏 부도이유와 평가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대우그룹의 한 줄기라 할 수 있는 하이마트의 현재까지의 매각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지요.

 질문 8. 후배 금융인에게 한 말씀?

상업은행 시절

 - 너무 같은걸 되풀이 하면, 머리가 퇴화되어 다 못 외울 것 같아서 몇 가지만 충고하고 싶습니다.

“공부 잘하는 금융인 시절은 지났다. 상대적 비교를 하지 말아라.인생은 가는 것이지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이제 100세 시대이다.”

자세한 설명을 안 해 주어도 은행원들은 머리가 좋아 잘 알아 들을 겁니다.

 질문 9. 향후 일요저널의 기업개선작업은 어떤 기준과 철학으로 하실 생각입니까?

 - 일요저널은 해외 동포나 시골농부들도 알고 있는 유명한 주간 신문입니다. 특히 오경섭 발행인은 KBS 공채21기 기자 출신으로, 경찰과 검찰, 국회 등 권력 기관과 행정 기관을 두루 거치고 청와대 출입 인터넷 기자 모임인 청인회 회장, 통신 기자협회 추진위원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의 기본이 정립된 기자입니다.

한 마디로 족보가 있다는 것이지요. 요즘 언론이 넘쳐 나다보니 자격 미달인 자, 학력조차 속이는 자들이 판치다 보니 무엇보다 정통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도 정통 금융인 출신으로, 증권과 보험사, 은행, 지하금융, 창투사. 추심사업무의 노하우를 언론사 경영에 보태 오경섭 발행인과 힘을 합하면, 많은 것을 추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를 바르게 평가 받을 수 있고, 기자나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은 언론사가 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직원들이 일요저널에 뿌린 ‘노력’과 ‘선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지켜져야 하지만, 변화에 대응해 개혁해야 할 것은 개혁해야 한다는 사고와 함께 한다는 경영철학으로 미디어와 금융의 융합을 실현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21세기 컨텐츠 강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창조 경제에 부응하고 국민과 기업을 더욱 유(有)하게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리: 김태성 기자>

편집부  edit@ilyojour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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