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상태에서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 초속 30만㎞다. 누가, 언제, 어디서 측정하든 값은 똑같다. 하지만 ‘빛의 가격’을 측정할 때는 다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에 따라 빛의 값어치는 달라진다. 컴컴한 동굴 속에서 밝힌 촛불과 네온사인 번쩍이는 도시에서 밝힌 촛불의 가치는 같을 수 없다.
  
한 나라의 경제 규모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공식을 적용해 값이 나오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환경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국내총생산(GDP) 통계의 신뢰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한 건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는 “GDP 0.1~0.2% 차이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GDP는 한 나라의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다. 대공황의 삭풍이 몰아치던 1932년 미국 의회는 경제학자인 사이먼 쿠즈네츠에게 국가의 수입을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제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쿠즈네츠는 국민총생산(GNP)이란 지표를 만들었다. 이후 글로벌화가 활발해지면서 ‘국민’보다는 ‘국내’에서 생산한 재화와 시비스를 중심으로 한 나라의 생산 규모를 따지는 지표로 GDP의 유용성이 커졌다. 정확한 GDP가 산출되면서 통화·재정 정책을 제대로 펼 수 있었다. GDP를 ‘경제학의 최고 발명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GDP는 우리 주변에서 ‘우상’으로 부상했다. 실질 GDP성장률(경제성장률)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유령처럼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경제 성장’을 국정의 중심에 놓지 않은 정부는 없었다. 이명박 정부는 ‘747(연평균 7% 성장, 소득 4만 달러 달성, 선진 7개국 진입)’을, 박근혜 정부는 ‘474(4% 잠재성장률 달성, 70% 고용, 4만 달러 국민소득)’를 제시했다. 노무현 정부, 김대중 정부, 그 이전의 정부도 경제 성장을 외치지 않은 적이 없다. 높은 경제성장률은 정권의 최대 치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전문가들이 데이터를 분석해 내놓은 통계를 국민은 체감할 수 없었다. 느끼는 경제 상황과 GDP의 괴리는 커지기만 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몇 년간 GDP 증가분에 비해 가계소득 증가분은 미미했다. 생산이 늘어 생긴 부가 국민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시대가 변하면서 GDP의 명성이 퇴조하는 이유다.
  
GDP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다. 생산의 시대에 GDP는 각 나라의 덩치를 비교하고, 발전 정도를 견줄 수 있는 최고의 통계치였다. 하지만 소비의 시대로 변하면서 새로운 디지털 서비스는 GDP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이 총재는 “학원 수강 대신 유튜브를 통해 무료 강좌를 들으면 소비자의 효용성은 높아지는데 GDP는 오히려 줄어든다”고 말했다. GDP는 가격이 입혀지지 않은 생산물과 서비스를 통계에 반영하지 않는다. 이 총재가 “디지털 경제를 반영하지 못하는 통계는 한계가 있다”고 한 이유다.
  
GDP는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도 무시한다. 미세먼지 뿜어내는 자동차를 생산할수록, 화력 발전소를 돌릴수록 GDP는 늘어난다. 스트레스로 병이 생겨 치료 비용이 많이 들수록 GDP는 증가한다. GDP는 단순하다.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생산량만 따지니 환경이 나빠져도, 질병이 창궐해도, 범죄가 들끓어도 경제는 성장하는 걸로 비친다.
  
이렇게 되니 본질적인 질문까지 나오고 있다. “GDP가 늘면 인간의 삶도 행복해지는가.”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이다. GDP는 삶의 질을 고려하지 않는다. 내가 여가를 즐기고, 가족을 위해 가사노동을 했을 때 느끼는 행복감 같은 무형의 가치는 GDP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요소를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하는 게 GDP"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와 아마르티아 센 교수 등은 2008년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경제 실적과 사회 진보 계측을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연구 끝에 GDP 숫자의 맹신에서 벗어나 ’국민 총행복‘을 높이는 새로운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르코지는 ”세상과 사회와 경제는 변하는데, 그것의 측정 방식이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GDP는 위대한 개념이다. 경제 규모뿐 아니라 물질적 번영의 정도를 가늠하는 지표 중 GDP만 한 것은 없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생산이 전부가 아닌 시대다. 경제 정책도 성장률 몇 % 더 끌어올린다고 박수 받지 못한다. 한국개발연구원이 지난달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6%로 낮췄다. 종전 전망치(3%)보다 0.4%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경기 침체의 먹구름이 짙다고 걱정이다. 그렇지만 전망치를 올렸다고 행복감이 높아졌을까. 맹목적으로 성장률 숫자만 좇는 정책은 내려놓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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