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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보도〕적자운영에 시달리는 한국 골프장!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골프장 정책의 전환을 통해 관광활성화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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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탄 세계 골프의 역사와 한국골프의 역사

한국골프의 역사는 1900년경부터 시작됐다. 벌써 1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1984년 골프장 28개소, 연간 내장객수 130여만 명이던 것이, 1997년에는 운영 중인 골프장이 112개소, 연간내장객이 800여만 명이었으나, 지금 전국 골프장은 퍼블릭 골프장을 포함해 무려 500개소에, 연간내장객수 만 해도 3500만 명 시대를 넘어섰다. 이렇게 한국골프인구는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골프는 이제 대중화되어 국민체육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몇몇 골프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골프장들은 적자운영에 시달리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할 수 없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골프장 운영정책의 부재 탓이다. 이에 선데이저널에서는 세계 골프의 역사, 한국골프의 역사 및 국내골프장의 운영현황과 문제점 및 개선책을 심층 취재하여 기획 보도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세계 골프의 역사

세계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양을 기르던 목동들이 끝이 구부러진 나뭇가지로 돌멩이를 날리는 민속놀이가 구기로 발전했다는 설과 기원전 네덜란드에서 어린이들이 실내에서 즐겨하던 콜프(kolf)라는 경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네덜란드의 콜벤이라는 오늘날의 크리켓이나 아이스하키와 비슷한 구기가 14세기경 바다를 건너 스코틀랜드에 전래 되었다는 설이 있다.

15세기에는 골프가 지나치게 성행하여 국민의 무도(武道)와 신앙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칙령으로 전면금지하거나, 안식일에는 플레이를 금지하였다. 골프는 귀족계급에도 만연되어 왕도 즐겼으며, 16세기 이후에는 신분의 상하를 불문하는 스포츠로까지 발전되고, 잉글랜드에까지 파급되었다. 골프를 ‘Royal and Ancient Game’이라고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골프에 관해 발견된 기록에 의하면 1744년 스코틀랜드에서 지금의 에든버러 골프인 협회의 전신인 신사 골프협회가 조직되어 경기를 한 것이 골프클럽과 경기대회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실버클럽대회라 하여 실물크기로 만든 은제트로피를 만들어 쟁탈전을 벌였다.

이 협회의 의사록에는 13개조로 된 세계 최초의 골프규칙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행 골프규칙의 기반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 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각지에 골프클럽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선수권대회형식의 경기도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코스(올드코스)가 있다. 이곳에서 1754년 5월 14일 22명이 모여 ‘더 소사이어티 오브 세인트앤드루스 골퍼즈’를 결성하였으며, 경기규칙의 제정, 핸디캡의 통일, 선수권대회의 개최 및 운영을 담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 클럽이 영국골프계를 통할하게 되었다. 한편 여성골프클럽은 1872년 세인트앤드루스에서 조직되었다.

골프가 활발해지자 클럽이나 볼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직인이 나타났으며, 이들은 골프기술에도 능했으므로 실기교습에 종사하여 프로페셔널로서 인정받았다. 1860년 처음 제1회 영국오픈선수권대회가 열렸으며, 1885년에는 전영 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시작되었다.

골프는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가 1873년 캐나다에 아메리카대륙 최초로 로열몬트리올골프클럽이 창설되었으며, 1887년 미국 최초의 클럽과 코스를 자랑하는 폭스버그골프클럽이 발족되었다. 그 후 20년도 못되는 동안에 황금기를 구가함으로써 영국에 맞먹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894년 미국골프협회(USGA)의 전신인 미국아마추어골프협회가 창립되었고, 1895년 제1회 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같은 해에 전미(US)오픈선수권대회도 시작되었다. 현재 미국에 있는 3400개 이상의 골프클럽이 미국골프협회에 가입했으며, 9개의 국내선수권대회와 6개의 국제아마추어선수권대회를 주관하고 있다. 

미국의 골프는 20세기부터 영국을 능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국력이 피폐해지면서 골프계도 침체되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호경기에 의해서 미국골프의 대중화는 눈부시게 진전하여 모든 면에서 영국 등을 압도하였다. 

한국골프의 역사

초창기 국내골프의 도입 

우리나라에 골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880년대 영국인에 의해서였다. 1880년 원산항이 개항되자, 영국인들이 중국의 세관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1880년부터 1905년 사이의 기간 동안에 최초의 원산골프코스가 영국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세계 각지에 진출해 있던 영국인들의 생활풍습 상 거주하던 곳마다 반드시 골프코스를 두었던 점을 감안 한다면 위의 역사는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여겨진다. 한국과 일본의 골프역사의 시발점을 만들었던 영국인이 당시 한국의 관세징수사무를 맡게 된 과정을 확인하고 싶다면 일본관세협회 발행의 ‘세관백년사’를 방증자료로 제시 할 수 있을 것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80년 원산항이 개항되었고 관세징수사무를 청국에 위촉하였으나 당시 청국의 세관업무는 영국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조선골프소사(朝鮮골프小史)에 의하면 “구한국 정부시대에 외국인들이 개항도시인 원산의 세관구내에 6홀의 골프코스를 건설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곳 세관특구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마을노인들로부터 구전되었을 뿐이며, 또한 원산근교의 외인촌과 황해도 구미포에서 위와 비슷한 골프코스가 존재했지만, 한국인의 출입뿐만 아니라 일본인까지도 출입이 통제되었다고 한다. 

그 후 원산이 시세의 확장에 따라 시가지 광장건설을 하게 되어 주택을 철거하던 중, 영국인이 살던 집 다락에서 낡은 골프채가 발견되어 구전되어오던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1897년 세관구내 해변가에 조성된 골프코스는 일본보다 6년이나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골프의 창시기 

1917년에 조선철도국(朝鮮鐵道局)은 만주철도주식회사로 이관되었다. 조선철도국의 安藤又三郞 이사는 대련만철본사(大連滿鐵本社)에 출장 중, 성포골프코스의 광대하고 쾌적한 플레이 현장을 보고, 경성에도 골프코스를 건설할 것을 구상하게 되었다. 

다각도로 연구·검토한 결과, 철도국 직영의 조선호텔 숙박객에 대한 서비스 및 외래객 흡수책의 일환으로 호텔부속 골프코스를 건설할 것을 결정하고, 철도국관리 하에 건설계획이 추진되었다. 이렇게 하여 효창원골프코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회원들은 골프규칙이나 에티켓을 알지 못했다. 

그 후 1921년 1월 조선호텔에서 고책유치수단으로 골프장설치를 계획하고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자리에 경성골프 구락부를 개장하였다. 그러나 이 골프장은 1923년 공원지정으로 인해 폐장되고 말았다.

본격적으로 한국골프가 궤도에 들어선 것은 1929년 군자리(오늘날 어린이 대공원 위치) 골프장이 개장되면서 부터이다. 군자리 골프장은 원래 왕실의 능자리였으나, 영친왕인 이은 공이 무상으로 임대 해주고 골프장 건설비로 거액을 하사함으로서 완벽한 시공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1924년 한국 최초의 정규코스인 파 70의 18홀인 골프장 육림이 개장되어 1929년 폐장될 때까지 활발히 운영되었다. 이 골프장은 일반인에게도 개방하여 골프인구를 확산시키는데 일임을 담당하였고, 1929년에는 제1회 조선골프선수권대회도 개최하여 한국골프사의 첫 장을 연 골프의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22년 6월에 정무총감 有吉忠一가 부임한 이후 플레이방식이 개선되었으며, 그는 골프에 관심이 많았으며 영국식골프에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관민을 통하여 많은 골프애호가를 배출하게 되었다. 효창원골프코스가 공원으로 유입됨에 따라, 골프코스는 청량리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철도국과 호텔로부터 골프코스는 완전히 독립하여 건설되었으며, 1924년 4월 20일 설계나 자금투자를 달리한 사단법인 경성골프구락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대구(1923), 평양(1928), 군자리(1929), 원산(1929), 부산(1932)골프코스 등이 차례로 개장을 하게 되었다. 

1937년 9월 23일 경성골프 구락부에서는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규약과 임원이 결정되었다. 이사장, 상무이사, 이사가 1명씩 선임되었으며, 대구, 평양, 부산, 원산골프코스에서 이사 각 1명씩을 선임하고, 정식으로 조선골프연맹이 발족하였다. 골프연맹의 창설활동은 활발하였으며 골프의 밝은 전망을 볼 수 있었다. 

최초의 한국인 골퍼는 1924년 청량리 골프코스에서 등장하였으며, 1929년에 개장한 군자리 골프코스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골퍼들이 경기를 개최하고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군자리 골프코스에서 최초로 캐디가 등장했다고 한다. 

조국의 광복과 한국골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골프코스는 농경지로 변모하였으며, 광복 후 4년 만에 골프코스를 복구하게 된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군자리 골프코스가 복구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장시공은 연덕춘 프로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농경지를 경작하던 소작농들의 잦은 시위로 코스복구 작업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소작농들의 요구를 일부 수렴하고 지원을 하기로 하여, 복구공사는 1949년 5월 완전히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복구 1년 만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으로 코스는 또다시 황폐화 되었다. 6.25동란이 지나고, 1954년 7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군자리 골프코스는 전장 6750야드, 파 72의 국제규격으로 재 복구 되었다.

그리고 1953년 11월 11일 한국골프사상 최초로 우리 손으로 이룩한 군자리 골프코스를 운영해 나갈 사단법인 서울컨트리 구락부를 창설하였다. 이를 발단으로 1955년에는 부산컨트리 구락부가 발족되었다. 1954년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1958년 6월 12일 군자리 골프코스에서는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군자리 골프코스는 한국골프의 활성화를 도모하였으며, 해외교류의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서울컨트리클럽 군자리 코스는 한국골프의 총본산 역할을 해야 했으며, 서울컨트리 구락부에 의해 운영되었던 골프계는 제4회 월드컵골프경기 참가를 계기로 하여 한국 내 골프 대표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1965년 9월 14일에 개최 되었던 한국골프협회창립준비위원회 회의록에는, "한국골프협회는 1959년에 창설 되었으나, 4.19의거당시 각 정당, 사회단체의 해산지시에 따라 유명무실한 상태로 지금에 이르렀다"고 수록되어 있다.

1959년 골프계의 숙원사업이었던 한국골프협회가 발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골프의 대표기관으로서의 그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재정․운영 면에서 여건이 미흡하였다. 

1960년 한국골프협회는 4.19 학생 의거로 각 정당․사회단체의 해산지시에 따라 창립 1년 만에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골프계는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되는데, 1965년 9월 14일 한국골프협회의 재 창립을 조속히 추진하려는 동호인들이 모여, 협회창립소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창립활동을 하게 된다. 

1965년 9월 14일 개최된 협회창립준비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협회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1965년 9월 23일 가진 한국골프협회창립총회에서 총대의원 13명중 12명의 출석으로 개회를 선언하였다.

1953년 11월 11일 발족했던 서울컨트리클럽은, 한국의 골프를 본 괘도에 올려놓으려는 10여 년 간의 끈질긴 추진으로, 많은 역경과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1965년 9월 23일 조국광복 후 최초로 한국골프협회가 출범하였다. 

사단법인 한국골프협회설립허가신청서를 관계당국에 제출, 1965년 5월 3일부로 허가를 받음으로써 합법적인 대표기관으로 행사하게 되었다. 1965년에 창립한 한국골프협회의 시급한 과제는 한국골프의 위상을 세계 골프수준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65년 12월 17일 협회는 국제골프연맹과 아시아골프연맹에 한국골프협회의 창립을 통고함으로써 국제 골프계와의 경기와 교류를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각종 국제경기에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1959년에서 1976년 사이에 국내골프의 전망을 밝게 본 기업들이 골프장을 활발히 건설하게 되었다. 최초로 1964년 건립된 한양컨트리클럽을 필두로, 1966년 태릉컨트리클럽, 1968년 안양컨트리클럽(현 안양베네스트골프클럽), 1970년 용인컨트리클럽(현 양지컨트리 클럽), 1975년 수원컨트리클럽 등 20여 개의 골프장이 이 기간 내에 건설되었으며, 이 시기가 우리나라 골프사의 육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후 골프코스건설이 수도권 주변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1964년, 1966년에 이어 개장된 한양컨트리클럽과 태릉컨트리클럽이 개장되면서 한국골프는 견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1966년 5월 한국골프장협회(KGA)가 발족했으며, 1968년 12월 한국프로골프협회(PGA)가 창립되어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골프의 전환기 

우리나라 골프발전의 많은 기념비적인 일들을 해온 군자리 코스는 1970년 12월 4일 정부 방침에 따라 갑작스럽게 어린이 대공원으로 개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서울시측은 시가지가 앞으로 확장하게 될 전망이므로, 군자리 코스의 위치는 골프코스로서는 적당하지 않는다는 의견이었다. 

1972년 10월 31일, 40여 년 간의 우여곡절을 이겨내었던 군자리 골프코스는 골프동호인들이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사단법인 한국프로골프협회에서는 1968년 5월 17일, 연덕춘, 박명출, 배용산, 한장상, 이일안, 조태운 프로골퍼들이 모여 '한국프로골프협회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각종경기를 치르면서, 프로골퍼의 부단한 기술향상과 국제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68년 5월 22일 한국프로골프협회 제1차 이사회를 허정구 이사의 사회로 개최함으로써, 한국프로골프협회출범 제1호 임원단의 구성을 보았다. 명문 골프장의 합리적인 운영과 골프장을 통한 관광사업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전국골프장의 이사장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골프장사업협회가 1974년 1월 1일 창립하게 된다. 또한, 한국 시니어골프선수권대회 등의 각종 국내골프경기가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협회의 창립과 골프코스건설 등, 골프발전을 위한 골프계 인사들의 활발한 활동은, 우리나라 골프가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다. 

한국골프의 발전기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에는 더 많은 골프코스건설이 추진되었다. 1979년에 제주도 오라골프장이 개장되었으며, 경주에서는 조선컨트리클럽의 건설이 추진되었다. 80년에는 경기도 정아골프코스, 82년에 창원골프장, 83년에 광주골프장 등이 연이어 건설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대중화되는 경향을 나타냈다. 

경기사업을 살펴보면, 1984년에는 각종 경기사업이 22종목으로 늘어났다. 골프경기와 협회의 경기사업은 본 괘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최한 제9회 아시안게임에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됨으로써 우리나라 경기사업의 활성화를 도모하였으며, 주니어 신인 골퍼의 수와 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1984년 제2회 주니어 학생골프선수권대회에는 대학생을 포함하여 100명 가까운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여성골퍼들의 증가로 한국아마추어부녀골프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다. 제3회 대회에는 30여명, 1980년 제5회 대회에는 50여명, 1984년 제8회 대회에는 84명의 여성골퍼들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경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오란씨 오픈선수권대회, 쾌남오픈골프선수권대회, 연합오픈골프선수권대회, 부산, 삼양, 수원, 동해오픈골프선수권대회 등 한국골프의 대 성장기를 이루었다. 

특히, 매경오픈선수권대회는 매일경제신문사가 우리나라의 골프를 건전한 국민스포츠로 육성하기 위해 1982년에 창설했다. 또한, 1982년도 제29회 멕시코 월드컵국제골프선수권대회에서 최상호 선수가 개인전에서 5위를 차지함으로써 국위를 선양하였다. 국제골프연맹은 대회의 세계화를 위하여 각국에 골프외교를 벌였다. 

1980년대는 여자선수들의 대회참가로 여성골퍼의 지위향상과 함께 골프계의 발전이 거듭되었다. 한국골프협회는 미래의 한국골프를 짊어지고 나갈 꿈나무들을 육성보호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주니어골프교실이다.

한국골프협회는 학생 및 주니어골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 미국골프협회, 영국 R&A, 그밖에 30여 개국 골프단체와 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해가면서 한국골프경기 일정 안내와 골프장 시설 소개, 그리고, 현행 문화체육부에서 발행한 한국소개 화보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1984년 골프장 28개소, 연간 내장객수 130여만 명이던 것이, 1997년에는 운영 중인 골프장이 112개소, 연간내장객이 800여 만 명을 넘어섰다. 이렇게 골프인구는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에 있으며, 골프는 이제 대중화되어 국민체육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프로골프분야에서는 박남신, 이강선, 김종덕, 구옥희, 1997년 APGA, 오메가투어 우승을 한 강욱순 프로와 같은 많은 우수한 선수들이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국골프의 국제적 위상 또한 높아져서 국제적 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등 놀라운 발전을 하고 있다. 

이후 삼성물산의 박세리 선수는 삼성그룹의 후원과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여 미국 4대 메이저 대회 중 1998년 맥도널드미국여자프로골프 챔피언십우승,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을 하여 2개를 석권하는 놀라운 위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로서 우리나라의 골프 위상은 세계무대로 발돋움 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최경주, 양용은, 박인비 등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골퍼들을 계속 배출해내고 있다. 한국 최초의 골프코스는 1900년 "구한말 영국인들이 원산세관 구내에 6홀의 골프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쳤다"는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국골프발전의 효시는 1917년 철도국 직영이었던 조선호텔이 여행객 서비스와 외국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골프코스 조성계획을 마련하여 1918년 정식허가를 얻어 용산 효창공원 부근인 국유지를 차용해 1919년 5월 착공하여 1921년 6홀 코스인 골프장을 개장 하였으나 1923년 공원지정으로 폐장 되었다. 

청량리골프코스는 18홀로 1924년 완공하게 되고, 그 해에 사단법인 경성골프구락부가 창립되어 국내 최초의 골프경기인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된다. 이 대회는 일본인 골퍼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국내 골프 경기의 효시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한국 골프의 시작은 1929년 군자리 골프장(현 어린이 대공원)이 개장 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인 연덕춘은 1935년 일본 관동프로골프협회로부터 프로자격증을 획득하였고, 1941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일본오픈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였다. 이후 1956년 1월 필리핀 왁왁 컨츠리크럽에서 개최한 극동오픈선수권대회, 같은 해 3월 런던에서 열린 월드컵의 전신인 카나다컵에 출전하였다.

한국최초의 프로경기는 1958년 서울컨트리구락부에서 골프수업을 받은 프로골퍼와 프로 양성자들이 같이 출전한 한국프로골프선수권 경기이다. 같은 해 오픈경기의 효시인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가 창설된다. 한국여자프로골프는 1978년 프로골프협회에서 여자 프로부 신설을 결정하고 프로테스트를 통하여 여자프로를 배출하고 여자부 경기를 가졌다.

▲한국공증여행사 상호협력양해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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