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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기생의 사랑, 그 소설적 재구(再構)①- 이승은 장편소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대하여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노라니 덧없는 광음(光陰)은 강물처럼 흘러갔다. 시인 백석(白石, 1912 ~1996)의 삶과 작품을 떠올려볼 때 더욱 그러하다.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백석이란 이름은 결코 입에 담아선 안 될 금기어(禁忌語)였다. 북으로 간 시인이란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1987년 내가 펴낸 <백석시전집>(이동순, 창작과비평사)이 출간되면서 백석의 시작품에 대한 인기와 반향은 나날이 올라만 갔다.

분단 이후 최초로 발간된 백석시전집(이동순, 창작과비평사, 1987)

우리 민족문학사가 잃어버린 시인의 작품을 다시 되찾았다는 감격을 알리며 저널리즘에서의 반응이 우선 뜨거웠고, 백석의 시작품을 연구 분석하는 논문, 비평들이 잇따라 쏟아졌다. 젊은 시인들은 습작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시인이 백석이라 고백하였다. 시 창작에 백석의 스타일이나 율격의 호흡, 문체적 방법론을 수용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가는 문학인들도 늘어갔다. 잊을 만하면 여기저기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백석의 시작품이나 서간, 글귀 등이 새로 발굴되어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백석의 시작품에다 곡을 붙이고 노래를 만들어 오로지 백석의 시작품으로 음반을 내고 콘서트를 개최한 대중음악인(김현성, 백자)도 출현했다. 백석의 모든 작품을 다시 정리한 <백석시전집> <백석전집> 등의 다양한 출간도 봇물처럼 이어졌다. 백석의 동화시(童話詩)에다 예쁜 그림을 붙여서 아동도서로 출간하는 사례들도 잦았다.

가히 현재 한국문단은 봇물 같은 백석 시인의 성세(聲勢)라 해도 좋을 만한 형국이다. 시인의 이름조차 거론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음에 비해 볼 때 지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작품이 수록되고 수능시험에도 자주 출제가 되는 명망 높은 대표시인 반열에 올랐다. 시인 안도현은 백석의 행적을 샅샅이 탐색 궁리하여 <백석평전>(다산북스, 2014)을 발간하고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급기야 멋쟁이 시인과 기생의 사랑을 다룬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우란문화재단 개발 프로그램, 2016)까지 무대에 오르게 되었고 강필석, 오종혁, 이상이, 정인지, 최연우 등 젊은 실력파 배우들이 열정적 연기를 펼쳐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TV 다큐멘터리, 라디오드라마 등으로도 백석 테마가 다수 제작된 사례까지 있으니 여기에 달리 더 무엇을 보태리오. 이젠 옛 시인과 기생의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는 일만 남았다. 무릇 백석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의 문학이 머금고 있는 힘의 실체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우리 곁에서 줄곧 활발하게 작용하고 분출하며 우리 삶을 달아오르게 하고 있는가?

일본 유학시절의 백석 시인 ©이동순

자, 이만하면 이제 가히 백석학(白石學)이란 독립된 용어도 가능해진 시기에 다다른 것이 아닐는지. 백석의 작품과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창작, 공연, 발표, 토론, 세미나, 학술대회, 저널리즘을 활용한 백석 테마의 프로그램 제작, 다양한 응용과 변형, 문화적 융합과 재창조의 가시적 성과 및 그에 대한 총체적 분석과 연구의 흐름을 일러 우리는 백석학이라 칭하고자 한다. 백석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서 당당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된 것이다. 시인 안도현은 이런 분위기에 크게 격려 고무되어 가까운 시일에 ‘백석학연구회’를 조직하고 연구자와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독특한 학회를 발족시키자는 제의를 했다.

이런 전반적 추세는 단절되지 않고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그것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백석과 그의 애인 자야를 다룬 장편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을 완성 발표한 작가는 이승은! 우리에겐 비록 생소한 이름이나 일찍부터 백석의 시작품과 관련 자료들을 읽고 궁리 성찰의 시간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는 원고뭉치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리곤 최초의 <백석시전집> 발간으로 문학사에서 백석문학 복원(復元)의 물꼬를 튼 장본인에게 자기작품에 대한 견해를 듣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불감청(不敢聽)일지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스스로 백석학 자료를 안고 찾아왔으니 이 얼마나 반갑고 흐뭇한 일인가. 안도현 시인의 <백석평전>만 하더라도 일단 완성된 원고를 나에게 가장 먼저 보내어 감수를 요청했던 기쁨과 영광의 추억이 아직도 가슴에 선연한데 이번엔 백석 테마의 장편소설까지 대면하게 되었으니 그 즐거움은 작품을 읽으며 줄곧 회심(會心)의 미소를 짓도록 하였다.

특히 작가 이승은의 경우 백석 시인을 사랑했던 김자야 여사의 회고록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1995)을 읽은 감동의 파장을 안으로 굳게 다지며 그 과정에서 솟구쳐 오른 창작의 충동을 오래도록 모색하고 기획하였다. 그러한 과정의 끝에서 드디어 이를 장편소설로 집필하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그 기나긴 몰입(沒入)의 시간 끝에 마침내 작품의 완성이라는 획기적 결실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고백은 삶과 대상에 임하는 작가의 진지한 자세와 성실성을 엿보기에 충분하였다.

8·15해방과 더불어 동시에 시작된 분단체제는 국토와 민족의 분단만이 아니라 문학사의 분단까지 초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 삶의 혼란과 더불어 창작풍토의 무질서는 실로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분단체제의 특성상 워낙 금기와 제약이 많았던 터라 창작풍토에서 삶과 인간의 문제가 전혀 배제된 채 관념과 허상만 남아있는 위선(僞善), 가식(假飾), 비겁성(卑怯性)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의 경우 6·25전쟁 시기에 태어나 청년기시절까지 시대사의 아픔과 상처가 남긴 불구적(不具的) 성향을 제대로 인식조차 못한 채 그것을 문학의 모든 것으로 알며 흡입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대학 국문과를 다니면서 시창작의 열병이 들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경북대학교 국문과에는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시인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창가에 개나리꽃이 만발했던 어느 해 봄날, 시인은 강의실에 들어와 현대문학사 강좌의 교재를 조연현(趙演鉉, 1920~1981)의 <한국현대문학사>로 지정했다. 막상 구입해보니 세로쓰기로 편집된 두툼한 단행본이었는데, 생경한 한자가 그대로 노출되어 단번에 읽어 내려가기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으로 볼 때 현대문학사와 관련된 균형 잡힌 저술들이 별반 없을 적이었다. 기껏해야 백철(白鐵, 1908~1985)의 <조선신문학사조사(朝鮮新文學史潮史)>와 한참 뒤에 나온 정한숙(鄭漢淑, 1922~1997)의 <현대한국문학사> 등이 전부였다. 백철의 책은 두 권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발간되었는데,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되었다. 출판사 이름이 백양당(白陽堂)과 수선사(首善社)로 기억이 나고 전편이 책의 장정도 아담하면서 읽기에 매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에서 풀려난 직후 우리의 현대문학사 저술은 별반 이렇다 할 게 없었다. 좌파평론가로 활동하다 전향했던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 1901~1950)가 어느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현대문학사>로 단행본을 낸 것이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이병기(李秉岐, 1891~1968), 백철 선생이 공동으로 저술한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란 책이 있었지만 평범한 대학교재수준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분단문학사의 맹점과 모순을 용기 있게 격파하고 극복하려는 학자 비평가들이 전혀 없었던 것도 학문의 절대적 빈곤성(貧困性) 중 하나이다. 하지만 백철의 저서는 열거식(列擧式) 서술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으나 어느 잡지에 발표되어 호평을 받았던 연재물로 거기선 분단문학사에서 볼 수 없는 꽤 많은 인물과 자료들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백석이란 시인의 이름과 작품의 일단(一端)을 처음으로 대면하였다. 대체로 20세기 초반, 소멸되어가는 농촌의 풍경과 유소년 시절의 추억을 다룬 작품들이었는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어서 또 다른 작품들까지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930년대 말 친구 화가 정현웅이 잡지 ‘문장’의 삽화로 그린 시인 백석 ©이동순

백철의 책에 비해 조연현의 문학사는 오로지 반공주의적 시각으로 서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말 친일문학에 대한 서술은 단지 ‘암흑기의 문학’이란 짧은 표현으로 대충 뭉뚱거리며 건너뛰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연현 자신이 일제말 덕전연현(德田演鉉)이란 창씨명(創氏名)으로 활동했던 친일계열이었으므로 그 항목에서 자신감을 갖고 집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술방식도 몹시 건조하고 단조로운 저작(著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춘수 교수 자신도 이 책을 막상 교재로 지정은 해놓고 교재를 활용한 강의는 거의 진행하지 않았다. 수강생들에게는 각자 열심히 읽어보라는 공허한 메시지만 날렸다. 한 학기 종강이 가까울 무렵, 그때까지 나아갔던 진도는 1920년대를 미처 벗어나지 못한 지점에서 머뭇거렸다. 이에 따라 책의 나머지 부분은 당연히 새 것 그대로 깔깔한 상태의 미개척분야였다.

이런 여건 속에서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진학으로 이어졌는데 그때 내가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했던 1973년이다. 대학원강의는 요즘처럼 수강생 숫자도 많지 않았고, 고작 한 둘에 불과해서 담담교수는 주말에 대구시내 다방이나, 선술집 탁자에서 만나 편리하게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김춘수 시인은 대구 중구 동성로의 금맥다방, 세르팡다방이 아지트였는데 특히 세르팡 마담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고전문학 전공의 이재수(李在秀) 교수는 당신이 즐겨 가시던 시내의 허름한 목로주점이 강의실이었다. 다방과 선술집에서의 대학원강의 내용은 대개 당신들이 살아온 세월의 험난했던 기억과 그 편린(片鱗), 그 와중에서도 창작의 길이나 국문학을 선택해서 즐거움을 느꼈던 추억들, 당신들이 이룩한 논저나 성과에 대한 자화자찬(自畵自讚)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보니 그 내용이 나름대로 귀한 가르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 수업을 마치면 하릴없이 대구시청 주변의 길가 좌우에 즐비하던 고서점을 순회하면서 빛바랜 장정의 문학서적들, 시집, 소설집, 평론집, 수필집 등을 닥치는 대로 사 모으던 간서치(看書痴)로서의 고지식한 집념이 지금도 신선하게 떠오른다.

사실 문학사강의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별로 없었다. 강의도 교재도 극히 제한된 문학인들의 활동에 대한 언급 정도였고, 분단과정에서 북으로 떠나간 문학인들의 경우는 무조건 배제대상이었다. 궁금해서 그에 관한 질문을 해보지만 그런 금단(禁斷)의 영역에 왜 궁금증을 가지느냐는 반문이 돌아오기가 일수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문학이 아니거나, 문학 이전의 상태에 불과하니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핀잔 섞인 답변만 돌아왔다.

대학도서관 서가에 꽂힌 영인본(影印本)을 두루 살피다 보면 이름 석 자 중 어느 한 글자를 ○나 ×로 표시로 가린 경우가 자주 눈에 띄곤 했는데, 그게 바로 정지용(鄭芝溶), 김기림(金起林), 이찬,(李燦) 조벽암(趙碧岩), 조명암(趙鳴岩), 박세영(朴世永), 안회남(安懷南), 김남천(金南天), 이기영(李基永), 이원조(李源祚), 이태준(李泰俊), 설정식(薛貞植), 임화(林和), 이북명(李北鳴) 등이었다. 사라진 국문학자들로서는 김태준(金台俊), 김재철(金在喆), 이명선(李明善), 고정옥(高晶玉), 정형용(鄭亨容) 등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왜 북쪽을 선택해서 올라갔던 것일까? 그들의 이름을 기호로 가리는 은폐현실이 참 어설프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무슨 밀교(密敎)의 비밀스런 경전(經典)이라도 몰래 보는 듯이 내 가슴 속에서는 그 이름들의 작품과 행적에 대한 불같은 궁금증으로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1960~70년대 대구의 고서점가들, 이를테면 남구서림, 문흥서점 등 여러 곳에서 그나마 옛 문학사 관련 자료들을 풍부하게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학자, 문인 등 책을 사랑했던 인사들이 전쟁과정에서 피난 내려올 때 자신의 사랑했던 소장도서에 대한 애착을 차마 끊지 못해 그 무거운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힘든 걸음으로 대구까지 허겁지겁 갖고 왔을 터이다. 그러다 양식이 떨어지니 아끼던 책들을 불과 쌀 한 됫박과 바꾸지 않았을까 한다. 그 덕분에 당시 수집했던 귀한 문학사 자료들을 아직도 많이 갖고 있고, 이것은 뒷날 우리문학사가 잃어버린 분단시대 매몰문학인(埋沒文學人)들의 전집을 속속 발간할 때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북한에서의 백석 시인 가족들 ©이동순

대학원 졸업 후 교수가 되어 강단에서 본격적인 문학사강의를 하고 논문도 쓰며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1980년대 중반, 나는 마음속에서 백석 시인의 작품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불현듯 일으켰다. 그것은 당시 시작품들의 난삽하고 경박한 풍토에 대한 저항과 반발심 때문이었다. 영인본으로 제작된 옛 신문, 잡지, 간행들을 헤매 다니며 백석의 이름자를 발견하기 위해 나는 혈안이 되었다. 백(白)이라는 활자만 보고서도 반색하여 이를 확인하면 어김없이 평론가 백철이거나 소설가 백신애(白信愛, 1908~1939)였다. 아주 드물게 백석의 시작품을 찾아내었거나 작은 글귀의 흔적이라도 확인하게 되면 그날의 쾌재(快哉)는 말로 형언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게 되니 어느덧 가랑잎처럼 흩어진 백석 시인의 작품은 파일에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어느 틈에 백여 편 가량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것을 다시 시기별로 정리하여 찬찬히 음미하는 감격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쁨, 즐거움, 설렘뿐만 아니라 슬픔과 애잔함으로도 이어졌다.

외우(畏友) 이시영(李時英) 시인이 1980년대 후반 창작과비평사 편집장으로 근무할 적에 나는 이 작품을 벗에게 보내었다. 창비의 실질적 대표자였던 백낙청(白樂晴) 선생은 자신의 집안인 수원 백씨 문중에서 배출된 시인을 다루었다며 웃는 얼굴로 반색하였다. <백석시전집(白石詩全集)>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매몰된 문학사의 흙더미에서 최초의 삽질로 파 일구어 일정한 성과를 이룩한 이 책을 통하여 백석 문학연구는 비로소 본격화되었다. 말하자면 이 책을 필두로 분단시대 민족문학사에서 수십 년 동안 어이없이 매몰되어 사라졌던 백석문학을 다시 복원(復元)시키는 감동적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국문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인가.

전집이 발간되자 언론계에서의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 신문이란 신문마다 대서특필이었고, 우리문학사가 잃어버린 한 시인의 생애와 작품을 되살렸다며 칭찬이 쏟아졌다. 작고한 원로시인으로 1930년대의 대표적 모더니스트 중의 한 분이었던 우두(雨杜) 김광균(金光均, 1914~ 1993) 시인은 모필(毛筆)로 쓴 친필서간을 보내어 식민지시대 광화문거리를 걸어가던 백석 시인의 멋쟁이 풍모를 추억하며 나의 활동을 격려하고 칭찬했다.

전집이 발간되던 그해 겨울, 때마침 동아일보신춘문예 예심요청까지 들어와서 몹시 분망하였다. 서울에 거처가 없던 나는 불광동 무악재 부근 언덕배기에 살던 작가 김성동(金聖東)의 신혼집 방 한 칸을 빌려 자리를 마련했다. 신문사 문화부에서는 광화문우체국에서 빌려온 여러 개의 소포행랑에 수천 편 작품을 가득 담아 와서 방바닥에 쏟아놓았다. 산더미처럼 우람한 높이의 그 작품들을 나는 수일 밤낮에 걸쳐 심사에 골몰해야만 했다. 말이 신춘문예 심사였지 진행경과는 너무도 체계가 없었고 원시적이었다.

한 해가 가기 전 12월 초만 되면 신문사마다 신춘문예 공모마감이 이루어지고 저마다 청운의 큰 뜻을 품고 보내온 작품들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이에 따라 신문사 문화부에는 일련번호가 매겨진 커다란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여러 개 준비해두고 봉투를 뜯어 장르를 확인한 뒤 거기다 각각 던져 넣는 것이다. 시 장르가 가장 분량이 많았다.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은 주로 신문사에서 허드렛일을 돕는 사환(使喚)이나 알바생들이었다. 그 붐비는 와중에서 시조가 시로, 시가 시조로, 동화가 시로, 심지어는 소설이 시작품으로 서로 뒤죽박죽 섞여 던져지는 경우가 있었다. 투고자로서는 참 억울하고 분통터질 노릇이겠지만 자신의 작품이 관리자 실수로 다른 통에 잘못 들어간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신년호 발간 무렵까지 당선통지를 목을 빼어 기다렸을 것이다.

이렇게 겪는 심사 작업은 즐거운 작품읽기가 아니라 거의 악전고투에 가까울 정도로 가혹한 노동수준이었다. 온 삭신이 작품읽기의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거의 주리를 틀리다시피 되었을 즈음 나는 뜻밖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긋한 연륜이 느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품격을 갖춘 화법으로 나의 <백석시전집> 발간에 대한 노고를 치하하며, 이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자기가 진작부터 <백석시전집> 발간을 추진했었으나 여건의 미비로 지금껏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내가 그 소망을 대신 성취해주었다고 말했다. 나는 황급히 백석 시인과 가족 되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보다 긴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자며 빠른 시일에 상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신춘문예 예심을 부랴부랴 끝내고 함께 심사에 참여했던 김광규(金光圭) 시인과 찻집에서 만나 다시 최종선정 작품을 결정한 뒤 동아일보 문화부로 넘겼다. 그리곤 드디어 홀가분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나는 묘령(妙齡)의 할머니를 방문하기 위해 주소를 들고 곧바로 찾아갔다. <계속>

칼럼니스트 이동순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1950년 경북 김천 출생. 경북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1973), 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1989). 시집 <개밥풀> <물의 노래> 등 15권 발간.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백석시전집>(창작과비평사, 1987)을 발간하고 민족문학사에 복원시킴. 평론집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 각종 저서 53권 발간. 신동엽창작기금, 김삿갓문학상, 시와시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받음.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계명문화대학교 특임교수.

이동순  sunday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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