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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20년, 한국경제는 안전한가? (2)
  • 칼럼니스트 박흥주 경제학박사
  • 승인 2017.11.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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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주 경제학박사

IMF이후 우리경제는 어떤 변화를 이루어 왔는가? IMF이전 1997년 초 외환위기 시 한보를 시작으로 위에 열거한 대로 재벌,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수많은 기업과 금융기관이 도산하는 사태에서 외국과 외국 전문기관의 우리나라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정부의 위기관리능력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국가신인도는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 실례로 기아차 처리가 대표적이었다. 외환위기가 최고조로 위험수위를 향하고 있던 1997년 9월 22일 홍콩에서 IMF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기아차는 이미 사주가 없고, 전문경영인인 김선홍 회장이 경영하고 있었다. 기아차를 살려야 한다는 국민여론으로 국민성금을 모금하고, 대선을 앞둔 시점 등 사회적 분위가 고조 되어있는 기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IMF총회에서 당시 엄낙용 재정경제원 차관이 정부가 반드시 기아의 모든 부채를 갚겠다고 외국투자자들에게 확약을 하며 분위기를 역전시켰다. 법률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정부보증(Government Guarantee )을 확약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 기아차가 전격적으로 계열사 4개사를 법원에 화의(和議)신청을 하면서 분위가 완전 뒤 짚어지고 말았다. 투자자들과의 부도유예협약 조건으로 노조가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김선홍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난다는 사항을 모두 뒤 짚어버린 것이다. IMF와 해외투자자들이 완전 뒤통수를 얻어맞은 셈이 되었다.

즉각 외신은 한국정부의 위기관리능력을 최악이라고 비판하며 의심하기 시작했다. 국가신인도는 끝없이 더욱 추락하였다. 스탠다드 앤 푸어스(S&P)는 그해 11월 한 달 동안만 국가신용등급을 3~4번이나 강등시켰다.

그러니 외화는 채워지기가 무섭게 깨진 장독에 물 붓듯 빠져나가버렸다. 그러다보니 신용등급은 더욱 나빠지고,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앞에서도 예기했지만 당시 국민은 물론 정부관리 조차도 일부 관료들 빼고는 IMF구제 금융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재벌들이 무너지고 은행이 무너지고 환율은 치솟고 주식은 한없이 떨어지고 실업자는 쏟아지고 이렇게 나라전체가 아우성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수많은 고통들이 우리 국민에게는 IMF가 우리의 경제주권을 빼앗은 장본인처럼 인식하였고, 결과적으로 IMF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게 되었다.

흔히 ‘IMF 외환위기’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데, 이는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시아의 외환위기’라 표현해야 올바르다. 분명 IMF가 오기 전 아시아에 외환의 불이 났고, 이 불은 휘발성이 강한 바람을 타고 한국으로 그 화염이 옮겨 온 것이다. 이 불을 끄기 위해 IMF가 온 것이지 IMF가 한국에 불을 낸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IMF는 한국에서 위기의 원흉으로 불리었고 욕도 많이 먹었다. 물론 IMF가 요구하는 구제금융의 조건이 너무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또 어떤 조건들은 너무 가혹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30%대의 고금리정책, 재벌개혁, 산업구조조정, 노동시장유연화, 금융시장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구조조정 과정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IMF가 타켓이 되어 욕을 먹으니 IMF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밥 먹여주고 뺨 맞는 격이다.

1997년 11월 21일 우리정부가 IMF에 구제금융 신청을 하고, 그 해 12월 3일 캉드쉬 IMF총재와 임창열(현 킨텍스 사장)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이 구제금융합의서에 서명을 하는 작업들이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협상을 성공해 우리정부는 외환시장이 급속히 안정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결과는 오히려 위기가 더욱 확대되어갔다. IMF로부터 초기 일부 자금이 들어오자 모든 국내외채권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돈을 빼가기 시작했다. 

한국이 언제 부도날지 모르니 일단 서로 먼저 돈을 인출해가는 런(RUN)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12월 5일 고려증권, 12월 6일에는 한라그룹이 부도가 났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기업부도와 금융권부도로 경제시스템이 마비됐다. 그러자 해외언론이나 금융전문가들은 한국이 IMF관리체제에서 국가부도(Default)가 나는 첫 케이스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전 세계에 일어났다.

15대 대통령 선거일인 그해 12월 18일, 외화보유고는 38억 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이면 부도가 나야 한다. 한나절 소요 달러도 되지 않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밤, 한국 대통령에 DJ가 당선 되었다. 그러자 미국정부가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IMF협약내용을 확실히 준수 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면서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 재무부와 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월가의 주요 은행장들과 유럽의 주요재무장에게 자금인출을 자제하고 만기를 연장해주도록 요청을 한 것이다. 드디어 그해 12월 24일, 크리마스 이브에 ‘크리마스 페키지(IMF플러스 협상)’라 불리는 특단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모든 해외 채권자들이 FRB의 요청을 수용하였고, IMF 또한 100억 달러의 조기 자금지원까지 약속하였다. 드디어 한국 외환시장이 안정화를 찾는 크리마스 이브였다.

DJ 대통령의 이 성공적인 스토리들은 당시 정책당국자나 해외지도자들은 다 알고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다. DJ 대통령은 당선 되자마자 당선자 신분으로 국정을 콘크롤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국제사회에 IMF프로그램의 확실한 이행과, 자신의 국제사회의 지명도와 신뢰를 바탕으로 각국 지도자들과 투자자들, 해외금융가들에게 한국에 대한 금융안정조치들을 요청하였다.

대통령에 취임 후 IMF프로그램의 과감한 실천을 통하여 뼈를 깎는 기업구조조정, 금융개혁, 노동개혁 등을 전광석화처럼 단행하였다. 또 산업의 패러다임을 기존의 노동중심의 제조업 중심에서 새로운 첨단 산업으로 과감한 혁신을 일으켰다.

당시에는 용어조차 새로운 IT, NANO, BIO 등 신(新)산업을 지식산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국가산업 대 개조를 단행하였다. 이때 산업구조정만 하고 IT. BIO. CT. NANO 등 신산업을 육성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지금 무얼 먹고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국가위기에서 지도자의 리더십과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된다.

한편, 전 세계를 감동시킨 ‘금모으기 운동’으로 국란을 극복하는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금모으기 운동’은 전 세계에서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국란을 극복하는 유일무이한 감동의 사례로 평가받았다.

DJ 대통령 정부는 2001년 8월, 드디어 차입금 195억 달러를 전액 상환하며 IMF를 조기 졸업하였다. 3년 8개월 만이었다. 실로 전 세계에 대한민국 국민의 단합과 저력을 보여준 쾌거였다. 대통령이 직접 경제대책조정회의를 주재하며 위기 극복의 총대를 멨고, 국민은 정부를 믿고 고통을 인내하며 잘 따라주었기에 가능한 역사적 일이었다.

여기서 한 나라의 지도자의 리더십과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다. DJ 대통령의 해박한 경제지식과 지도력, 국제적 명성과 신뢰를 활용한 국제사회의 협조 등이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해냈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 당선 시 38억 달러밖에 없던, 정크 등급의 대한민국을 부도에서 구해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극복 과정에서 IMF의 조치들이 너무 가혹했다는 평가도 많다. 당시 IMF는 우리나라에 고금리정책, 재정긴축, 구조조정 등 강도 높은 요구를 하였다. 특히, 재정긴축은 아주 잘못된 조치였다. 

당시 우리나라 재정건전성은 아주 좋았고, 외환위기가 재정불건전성으로 발생한 것도 아닌데, 너무나 가혹하고 혹독한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또 고금리정책도 잘못된 정책이었다. 고금리 정책이 의도한 이점은 사라지고, 불건전한 기업은 당연히 청산되어야 한다 해도, 건전한 기업마저 부실화를 초래하여 수많은 건전기업마저 쓰러지게 만들었다.

칼럼니스트 박흥주 경제학박사  sunday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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